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역사속 드라큘라(4)





 5. 블라드 드라큘라의 어린 시절 


 블라드 드라큘라는 어떤 의미에서든 간에 15세기 역사에서 주역급 인물이라곤 할 수 없다. 사실 왈라키아의 궁정에서는 역사상의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은 동시대의 유럽과 오스만 양측에서 타인이 기록한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누가 어떻게 기록했는지에 대해서 천차만별이다. 더구나 그에 대해서 중요한 몇몇 내용은 기록이 누락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도 그러한데, 정확한 생일은 확실치 않다. 다만 출생 시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아버지가 용기사단에 입단한 1431년이고, 탄생 장소는 트랜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였다. 시기쇼아라는 블라드 드라큘(블라드 2세, 드라큘라의 아버지)의 망명 정권의 본부 같은 장소로 당시에는 매우 잘 요새화된 성이 존재했다. 

 블라드 2세는 적어도 1435년까지 여기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당연히 그의 어린 아들인 미르세아(Mircea, 1428년에 태어난 블라드 드라큘라의 형), 블라드(블라드 드라큘라), 라두(Radu the handsome, 라두 미남공, 1435년생)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장남인 미르세아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블라드와 라두의 어머니 역시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가장 가능성있는 사람은 몰다비아 공작 알렉산드루(Alexander the Good, 혹은 Alexander I of Moldavia)의 딸인 크네아즈나 공주(Princess Cneajna of Moldavia)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 블라드 2세가 알렉산드루 1세의 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블라드 2세는 다른 첩들도 있었기 때문에 약간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존재한다. 

 아무튼 시기쇼아라 시절은 1436년 블라드 2세가 형의 뒤를 이어 왈라키아 공이 되면서 마무리하게 된다.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사실 블라드 2세가 즉위했던 그 시점이 이 명칭에 딱 맞는 시절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는 세르비아를 야금야금 집어먹으면서 사실상 헝가리 왕국의 남쪽 국경과 왈라키아의 남쪽 국경까지 도달했다. 

 이 시점에서 헝가리 왕국은(앞서 이야기 했듯이 당시의 헝가리 왕국은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 일부 등을 포함해서 지금보다 훨씬 큰 국가였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사실 1440년에 헝가리 귀족들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넨치크(Władysław III Warneńczyk)를 국왕으로 옹립한 것도 (바로 이전 포스트 참조) 바로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헝가리 - 폴란드 동군 연합(같은 국왕을 모시는 두 개 이상의 국가 연합)이 들어선다면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막기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폴란드 귀족들은 헝가리와 힘을 합칠 생각이 없었으나 적어도 헝가리 귀족들의 희망은 그랬다)  

 한편 왈라키아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왈라키아는 이미 헝가리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트랜실바니아와는 달리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헝가리는 강대국이었으므로 부득이 왈라키아공은 헝가리 왕을 상위 군주로 모셨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북상하자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에도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블라드 2세는 어느 쪽을 택하기가 매우 애매한 상황에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는 박쥐 같은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록 이미 용기사단에 입단해서 황제와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로 맹세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도 왈라키아의 군주 자리를 둘러싼 내분에서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맹세를 지킨다든지 하는 일은 솔직히 그와 같은 약소국의 군주에게는 사치스런 일이었다. 


 6. 오스만 제국의 북상 

 블라드 2세가 왈라키아의 군주가 되던 시절,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무라드 2세(Murad II)였다. 술탄 메흐메트 2세(Mehmed II) 아버지인 무라드 2세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발칸 지역 모두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둬 유럽 국가들에 큰 위협으로 부상했다. 



(술탄 무라드 2세의 초상화.  ) 

 1440년에는 현재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Belgrade)가 오스만 군에 의해 포위당했다. 당시 발칸 반도는 세르비아계 소국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베오그라드는 헝가리 왕국의 남쪽 국경에 해당했다. 비록 베오그라드를 지켜내긴 했지만 이 지역까지 오스만 제국이 치고 올라온 사건은 1439년 국왕 알브레히트 2세(Albert the Magnanimous)가 죽은 후 혼란에 빠진 헝가리 왕국과 기독교 사회에 큰 위협으로 생각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블라드 2세는 무라드 2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결정한다. 선제 지기문스트가 승하한 직후인 1437년, 블라드 2세는 오스만 투르크와 조약을 맺고 매년 10000 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조건에 합의했다. 이는 물론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소국의 비애였다. 기독교를 수호하는 용기사단의 맹세를 지키기에는 그와 그의 조국이 너무 위험했다.

 한편 앞서 설명했듯이 1440년 초반, 헝가리의 야노스 훈야디는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막아내며 헝가리의 영웅은 물론 기독교 사회의 백기사(white night)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1441년 훈야디는 현재 세르비아의 스메데레보(Smederevo)에서 이사크 파샤(Ishak Pasha)가 이끄는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1442년 3월 22일에는 트랜실바니아에서 메지드 베이(Mezid Bey)가 이끄는 오스만 군을 궤멸시켰다.

 훈야디는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면서 공동의 방어 전선을 만들 목적으로 트랜실바니아 남쪽에 있는 (앞서 언급했듯이 훈야디는 트랜실바니아 공이다) 왈라키아의 블라드 2세에 압박을 가했다. 그에게 공개적으로 용기사단의 맹세를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어느 쪽 편도 들기 어려운 블라드 2세는 1442년 왈라키아를 통과하는 오스만 군대를 그대로 통과시켰다. 

 사실 그가 오스만 제국의 신하라면 오스만 군대에 합류해야 했고, 반대로 용기사단의 일원이며 헝가리 국왕의 신하라면 오스만 제국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어느 한쪽 편을 들면 반드시 반대쪽의 보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애매하게 중립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442년, 오스만 군대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훈야디에 의해 궤멸되었지만, 이 사건 이후 블라드 2세는 양쪽 모두에게 의심의 대상이 된다. 당연히 블라드 2세의 충성심을 의심한 술탄 무라드 2세는 블라드 2세를 수도 에디르네의 궁정으로 소환했는데, 아버지의 부재 동안 미르세아 2세가 왈라키아의 군주가 되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편 훈야디는 블라드 2세와 미르세아 2세 대신 친 헝가리파를 왈라키아 군주로 세우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가 내세운 대항마는 단 2세(Dan II)의 아들인 바사라브 2세(Basarab II)로 물론 드라큘파와 반대파인 단파 (다네스티) 계열의 군주이다. 

 1443년 왈라키아에 침공한 훈야디는 미르세아 2세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바사라브 2세를 앉혔다. 이와 같은 행동은 왈라키아 입장에서는 외세의 간섭이지만, 헝가리와 훈야디의 입장에서는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아무튼 외세에 의해 세워진 바사라브 2세는 오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다. 

 술탄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러 간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지위를 다시 탈환했다. 하지만 사실 블라드 2세의 자리는 매우 불안했다. 만약 헝가리가 다시 세력을 팽창하게 되면 아무래도 자신은 무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자신은 용기사단의 일원이고 자신을 비롯해 왈라키아인들 역시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오스만에 조공과 군사를 바치면서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 싸운다는 것도 꽤 부담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고생하는 동안 차남인 블라드와 삼남인 라두는 약소국의 왕자로 태어난 탓으로 볼모로 보내지게 된다. 1442년, 술탄의 궁정으로 간 두 형제는 한동안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1448년 왈라키아로 돌아올 때까지 미래의 블라드 드라큘라 (블라드 3세)는 감수성이 예민할 사춘기 시절을 부모와 떨어져 볼모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이 때 겪은 일이 그가 나중에 보인 잔인성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한편 1443-1444년에는 어쩌면 이들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이 발생했으니 앞서 설명한 바르나 십자군이다.


 다음 이야기 :  http://blog.naver.com/jjy0501/220259685965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세상에서 가장 큰 벌

( Wallace's giant bee, the largest known bee species in the world, is four times larger than a European honeybee(Credit: Clay Bolt) ) (Photographer Clay Bolt snaps some of the first-ever shots of Wallace's giant bee in the wild(Credit: Simon Robson)  월리스의 거대 벌 (Wallace’s giant bee)로 알려진 Megachile pluto는 매우 거대한 인도네시아 벌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말벌과도 경쟁할 수 있는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암컷의 경우 몸길이 3.8cm, 날개너비 6.35cm으로 알려진 벌 가운데 가장 거대하지만 수컷의 경우 이보다 작아서 몸길이가 2.3cm 정도입니다. 아무튼 일반 꿀벌의 4배가 넘는 몸길이를 지닌 거대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가칠레는 1981년 몇 개의 표본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추가 발견이 되지 않아 멸종되었다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2018년에 eBay에 표본이 나왔지만, 언제 잡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벌은 1858년 처음 발견된 이후 1981년에야 다시 발견되었을 만큼 찾기 어려운 희귀종입니다. 그런데 시드니 대학과 국제 야생 동물 보호 협회 (Global Wildlife Conservation)의 연구팀이 오랜 수색 끝에 2019년 인도네시아의 오지에서 메가칠레 암컷을 야생 상태에서 발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가칠레 암컷은 특이하게도 살아있는 흰개미 둥지가 있는 나무에 둥지를 만들고 살아갑니다. 이들의 거대한 턱은 나무의 수지를 모아 둥지를 짓는데 유리합니다. 하지만 워낙 희귀종이라 이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동영상)...

몸에 철이 많으면 조기 사망 위험도가 높다?

 철분은 인체에 반드시 필요한 미량 원소입니다. 헤모글로빈에 필수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철분 부족은 흔히 빈혈을 부르며 반대로 피를 자꾸 잃는 경우에는 철분 부족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철분 수치가 높다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수준이 있게 마련이고 철 역시 너무 많으면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철 대사에 문제가 생겨 철이 과다하게 축적되는 혈색소증 ( haemochromatosis ) 같은 드문 경우가 아니라도 과도한 철분 섭취나 수혈로 인한 철분 과잉은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철 농도가 수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이야스 다글라스( Iyas Daghlas )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데펜더 길 ( Dipender Gill )은 체내 철 함유량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변이와 수명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팀은 48972명의 유전 정보와 혈중 철분 농도, 그리고 기대 수명의 60/90%에서 생존 확률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유전자로 예측한 혈중 철분 농도가 증가할수록 오래 생존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유전자 자체 때문인지 아니면 높은 혈중/체내 철 농도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높은 혈중 철 농도가 꼭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는 결과입니다.   연구팀은 이 데이터를 근거로 건강한 사람이 영양제나 종합 비타민제를 통해 과도한 철분을 섭취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높은 철 농도가 조기 사망 위험도를 높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산부나 빈혈 환자 등 진짜 철분이 필요한 사람들까지 철분 섭취를 꺼릴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연구 내용은 정상보다 높은 혈중 철농도가 오래 유지되는 경우를 가정한 것으로 본래 철분 부족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낮은 철분 농도와 빈혈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철...

사막에서 식물을 재배하는 온실 Ecodome

 지구 기후가 변해가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비가 더 많이 내리지만 반대로 비가 적게 내리는 지역도 생기고 있습니다. 일부 아프리카 개도국에서는 이에 더해서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과 물이 모두 크게 부족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막 온실입니다.   사막에 온실을 건설한다는 아이디어는 이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사막 온실이 식물재배를 위해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사막 온실의 아이디어는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사막 환경에서 작물을 재배함과 동시에 물이 증발해서 사라지는 것을 막는데 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막화가 진행 중인 에티오피아의 곤다르 대학( University of Gondar's Faculty of Agriculture )의 연구자들은 사막 온실과 이슬을 모으는 장치를 결합한 독특한 사막 온실을 공개했습니다. 이들은 이를 에코돔( Ecodome )이라고 명명했는데, 아직 프로토타입을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컨셉을 공개하고 개발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막에 건설된 온실안에서 작물을 키움니다. 이 작물은 광합성을 하면서 수증기를 밖으로 내보네게 되지만, 온실 때문에 이 수증기를 달아나지 못하고 갖히게 됩니다. 밤이 되면 이 수증기는 다시 응결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돔의 가장 위에 있는 부분이 열리면서 여기로 찬 공기가 들어와 외부 공기에 있는 수증기가 응결되어 에코돔 내부로 들어옵니다. 그렇게 얻은 물은 식수는 물론 식물 재배 모두에 사용 가능합니다.  (에코돔의 컨셉.  출처 : Roots Up)   (동영상)   이 컨셉은 마치 사막 온실과 이슬을 모으는 담수 장치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도 잘 작동할지는 직접 테스트를 해봐야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