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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드라큘라(3)




 3. 니코폴리스 십자군 


 앞서 오스만 제국의 등장과 왈라키아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제 좀더 둘의 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할 때다. 14세기 후반이 되자 이미 오스만 제국은 왈라키아까지 넘보는 상황에 이르렀고 헝가리, 세르비아, 몰도비아, 왈라키아 등 주변국들은 크게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Battle of Kosovo)에서 세르비아의 라자르 공 (Prince Lazar Hrebeljanović)이 이끄는 범 세르비아 연합군과 술탄 무라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은 서로 막상막하의 전투를 벌여 거의 같은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나 이는 결국 나라가 큰 오스만 제국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지휘아래 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반면 라자르 공을 비롯해서 주력을 모두 잃은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미 14세기 말에는 오스만의 세력권과 왈라키아의 남쪽 경계가 서로 마주치는 상황이 되었다. 헝가리의 위성 국가면서도 헝가리에서 독립하려고 했던 왈라키아는 헝가리와 오스만 두 세력에 낀 상태에다가 앞서 설명한대로 두 파벌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내분을 벌이는 덕분에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왈라키아는 범유럽 십자군의 일원으로 오스만 제국과 최초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니코폴리스 십자군(Crusade of Nicopolis, 1396년)이다. 이 니코폴리스 십자군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점차 커지던 14세기 말 생겨난 범유럽 반 오스만 연합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1394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9세(Boniface IX, 재위 1389∼1404)가 교회 분열 상황에서도 반 오스만 십자군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헝가리 국왕 지기문스트(Sigismund,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가 이를 추진했다. 헝가리가 반 오스만 십자군을 주동한 이유는 물론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으나 의외의 일은 당시 백년전쟁을 치루던 프랑스와 영국에서 대거 참여한 부분이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잠시 휴전 중이었는데 샤를 6세(Charles IV)는 '기독교 국왕의 수장' 자격으로 기꺼이 이 십자군에 동참하기로 한다. 영국 역시 1000명 이상의 기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략 8000에서 1만명 정도의 병력을 제공했고 그외 독일과 헝가리, 왈라키아에서 군대를 제공했으며, 로도스 섬의 구호 기사단 (Knights Hospitaller)까지 여기에 참여해서 진짜 십자군다운 구성을 갖췄다. 마지막으로 해양 세력인 제노바와 베네치아 역시 이 전쟁에 동참했다. 

 15세기의 서방 연대기 작가는 유럽 군대는 16,000 명 정도였다는 상식적인 숫자를 제시했지만 투르크군은 20만에 달했다는 비현실적 수치를 제시했다. 반면 15세기 오스만 연대기 작가는 오스만 군이 6만명 정도였다는 그나마 좀 상식적인 숫자를 제시했으나 십자군은 무려 13만에 달했다는 역시 비 현실적인 숫자를 제시했다. 아마도 진짜 병력 수는 양측이 모두 수만명 이내였던 것 같다.

 아무튼 왈라키아의 미르세아 1세는 이 전투에 참여해 오스만 제국과 운명을 건 전쟁을 벌이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번개'라는 별명으로 불린 바예지드 1세의 탁월한 전술 앞에 치욕스런 참패를 겪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 처참한 실패는 멀리 떨어진 영국이나 프랑스에도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이제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왈라키아에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미르세아 1세  Mircea I of Wallachia, painting at Argeş Episcopy) 


 하지만 이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서 왈라키아는 살아남았다. 미르세아 1세는 현명하게도 병력을 보존해서 빠져나왔으며 이후에도 다뉴브 강 북쪽으로 올라오려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는 어려웠으므로 그의 치세 말기에는 매년 조공을 (금화 3000개) 바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이웃 세르비아나 불가리아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매우 훌륭한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티무르 1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혼란을 거듭했으므로 한동안 왈라키아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아들들은 오스만과 헝가리의 틈바구니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지만 말이다. 



 4. 야노스 훈야디와 블라드 드라큘


 이제 드라큘라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블라드 드라큘(Vlad II, Vlad Dracul)에 대해서 알아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미르세아 1세의 아들이지만 권좌에 오르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미르세아 1세와 그 아들인 마하일 1세(Mihail I), 라두 2세 (Radu II), 알렉산드루 1세(Alexdandru I) 세, 블라드 2세 (Vlad II)는 다네스티 계통인 단 2세 (Dan II), 블라드 1세(Vlad I) 등과 번갈아가면서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쉽게 말해서 공위를 뺏고 빼앗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블라드 2세는 1436년 형인 알렉산드루 1세가 죽고 나서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그런데 블라드 2세의 치세를 위협하는 세력은 사실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헝가리였다. 그것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야노스 훈야디 (John Hunyadi, Hunyadi Janos)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 인물은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블라드 드라큘과 더불어 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블라드 2세의 초상. Vlad II Dracul of Wallachia.  ) 


(야노스 훈야디의 초상화.  ) 


 야노스 훈야디는 15세기 역사의 중심에 선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아버지는 앞서 설명한 헝가리 국왕 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지기문스트를 섬기는 기사 가운데 하나였는데, 사실 높은 직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덕분에 훈야디는 정확한 탄생 시점도 알기가 힘든데 아마도 1406년 정도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누군지 확실치 않다. 

 아무튼 훈야디는 군사적으로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으므로 황제의 궁정에서 눈에 띄어 신임을 얻게 된다. 1437년 황제가 죽게 되자 그는 황제의 사위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독일 왕,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국왕(이 시절에는 두 나라가 하나였음) 등 어마어마한 직책을 지닌 알브레히트 2세(Albert the Magnanimous)를 섬기게 되었다. 사실 그는 온갖 왕위 및 작위를 지녀 풀네임이 엄청나게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풀 네임은 

Albert, by the grace of God elected King of the Romans, always August, King of Hungary, Dalmatia, Croatia, Rama, Serbia, Galicia, Lodomeria, Cumania and Bulgaria, elected King of Bohemia, duke of Austria, Styria, Carinthia and Carniola, margrave of Moravia, Lord of the Wendish March and Port Naon, Count of Habsburg, Tyrol, Ferrete and Kyburg, etc. Margrave of Burgau and landgrave of Alsace. 였다. 

 문제는 지기문스트 황제의 후계자 (황제의 슬하에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가 알브레히트 2세와 결혼했다)인 알브레히트 2세가 엄청난 직함에도 불구하고 2년도 안되어 이질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1439년 10월 27일 알브레히트 2세가 승하하자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등 일부를 제외한 유럽 전역을 호령하던 그의 대제국도 붕괴되기에 이른다. 

 갑자기 과부가 된 엘리자베스 왕비는 사실 임신한 상태였다. 알브레히트 2세가 죽고 4달이 지난 후 아들인 라디슬라우스 (Ladislaus the Posthumous)가 태어나자 이제 대비가 된 엘리자베스는 이 아들을 바로 오스트리아 공의 자리에 올리고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보헤미아의 왕위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시기 헝가리 왕위를 요구한 것은 이 아기 만이 아니었다. 1440년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넨치크(Władysław III Warneńczyk)는 자신이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위에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서 엘리자베스파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훈야디는 브와디스와프의 편을 들었고 그 댓가로 트랜실바니아의 군주가 된다. 일개 기사에서 일약 군주까지 승진한 셈이다. 

 다만 이 시기 트랜실바니아공 혹은 군주 (Voivodes of Transylvania)라는 자리는 꽤 위험한 자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로 오스만 제국을 막는 직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야디는 뛰어난 장군으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연이어 격퇴해서 그 명성을 유럽 전체에 드높이게 된다. 1440년대 초는 훈야디의 전성 시대나 다름 없었다. 

 훈야디의 놀라운 성공은 유럽에 새로운 십자군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 다시 블라드 2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렇게 훈야디가 승승장구할 무렵 블라드 2세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이야기를 다시 10년 전으로 거슬리면 1431년 블라드 2세는 뉘른베르크(Nuremberg)를 방문해서 용기사단 (Order of the Dragon)에 가입했다. 

 이야기는 나름 중요한데 블라드 2세가 드라큘(Dracul)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당시 헝가리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타이틀을 얻는 지기문스트 황제는 1408년 오스만 투르크 및 다른 기독교 이단들로부터 기독교 사회와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을 창설했다. 이 기사단에 가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황제의 가신이 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제국의 적인 오스만 제국과 싸운다는 것도 같이 의미했다. 



(용기사단의 문장. 용기사단이라고 하면 판타지 게임부터 생각날지 모르지만 실존했던 기사단이다. The symbol of the Ordo Draconum (Order of the Dragon))  

 블라드 2세는 기사단에 가입한 후 황제로부터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마침 그해에 트랜실바니아에서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블라드 3세 드라큘라이다. 이전에 이야기한데로 드라큘라 혹은 드라큘레아는 드라큘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드라큘(Dracul)은 라틴어로 드래곤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악마라는 뜻도 있지만 용이라는 의미도 있다. 기독교 세계와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단이 악마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용기사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블라드 3세 드라큘라는 용의 아들이라는 의미(son of dragon)이다.    

 우리의 주인공 블라드 3세 드라큘라는 1431년 트랜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Sighișoara)에서 태어났다. 본래 왈라키아인인 그가 왜 이런 장소에서 태어났는지를 비롯해서 그의 어린 시절과 블래드 2세의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다. 


 다음 이야기 : http://blog.naver.com/jjy0501/22025192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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