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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보물섬. 버진 아일랜드 이야기




(1911 년판 보물섬의 커버 아트. Treasure Island by Robert Louis Stevenson, Charles Scribner's Sons, 1911  ) 


 1883 년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 (Robert Louis Stevenson) 은 그의 대표작인 보물섬 (Treasure Island) 를 발표합니다. 이제는 꽤 유명한 고전이 된 이 소설의 배경이 어느 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널리 거론되는 후보가 되는 섬들은 카리브해 외딴 곳에 위치한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BVI : British Virgin Island) 에 몇몇 섬들입니다. (물론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몇몇 섬들도 스티븐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21 세기에 들어 다른 이유로 버진 아일랜드가 현대판 보물섬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영국 자치령이 조세 회피처 (Tax Haven) 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버진 제도는 푸에르토리코 동쪽의 여러 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령), 미국령, 영국령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영국령은 약자로 BVI 라고 부르며 대략 153 ㎢ 에 이르는 작은 섬들의 모임입니다. 인구도 27800 명 정도로 카리브 해 외딴 곳의 작은 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식민지 시절 다른 카리브해 섬들처럼 이 섬에도 사탕수수 및 담배 농장이 존재했으며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고와 백인 농장주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을 벌인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그 결과 인구의 83% 는 카리브계 흑인들입니다. 어업과 농업, 그리고 관광 산업 이외에 별다른 산업이 없는 작은 자치령 섬인 버진 아일랜드에는 놀랍게도 수만개의 기업과 많은 수의 금융 기관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쉽게 예측하 수 있듯이 이들은 대부분 페이퍼 컴퍼니들입니다.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가 영국 자치령으로 거의 사실상의 독립 상태에서 본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데다 세금도 낮고 규제가 매우 느슨한 점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 중에는 순수 투자 목적으로 규제를 피해 만들어진 헤지 펀드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 각지의 부호들이 여기에 재산을 은닉하고 조세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부분도 매우 많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즉 21 세기에는 해적 대신 세계 각지의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이 섬에 돈을 묻었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이슈가 된 것은 사실 매우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2013 년 3월에 갑자기 이런 역외 회사 (offshore company) 들의 실 소유주와 예금주들이 누군지에 대한 리스트가 새어 나갔는데 이는 다른 스캔들을 쫓고 있던 저널리스트 Gerard Ryle 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뜻밖에 그가 입수한 자료에는 260 GB 에 달하는 막대한 데이터가 있었고 이를 15 개월에 걸처 분석한 국제 탐사 보도 언론인 협회 ( 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  ICIJ ) 에 의해 21500 개에 달하는 유령 회사들의 실 소유주와 거래 내역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ICIJ 에는 BBC, 가디언, 르몽드, 워싱턴 포스트, 존탁스자이퉁 (SonntagsZeitung ) 등 여러 언론사가 속해 있음)  


 물론 이런 유령 회사들의 주된 목적은 세금이 거의 없는 '보물섬' 에 돈을 넣어두려는 것과 더불어 정당하게 거래가 불가능한 검은 돈을 숨기려는 것입니다. 보물섬의 해적들은 보물을 섬 어딘가에 숨겼지만 현대판 보물섬인 버진 아일랜드에는 5 층 짜리 빌딩하나가 18000 개 기업의 본사 주소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본사는 그냥 '유령 회사' 의 명목상의 주소일 뿐이고 진짜는 실 소유주와 거래 내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보물섬 어딘가의 보물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한 만큼 ICIJ 역시 이 회사들의 실 소유주와 거래 내역을 캐고 다녔는데 광맥을 찾아낸 셈입니다. 여기서 세계 각지의 유력자의 이름과 거래 내역이 밝혀지면서 점차 해당 국가에서는 스캔들로 비화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국세청들은 이 명단과 금액을 집중 조사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단 조지아 (그루지아) 의 이바니슈빌리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대선 캠프 재무 담당자였던 장 오기에, 러시아의 이고리슈발로프 제 1 부총리 부인, 탁신 전 태국 총리의 전 부인, 필리핀의 옛 독재자 마르코스의 딸, 몽골의 전직 재무장관 출신의 국회 부의장 바야르척트 상가자브 등이 고객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고객들의 명단을 보면 확실히 국경없는 세상이 되면서 전세계 모든 이들이 이 현대판 보물섬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천명의 명단이 더 공개될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버진 아일랜드에 회사수가 무려 수십만개나 되는 점을 감안할 때 검은 돈이나 세금을 회피해서 재산을 은닉한 케이스가 대거 드러나게 될 것으로 보여 적지 않은 파문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의 국세청 역시 국내 인사들의 명단이 나오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국내 유력 인사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국내에서도 상당한 파문이 예상됩니다. (특히 정치인이나 거대 재력가의 경우) 하지만 포함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겠죠. 이 명단이 전부가 아닌데다 조세 회피처로 인기 있는 곳이 버진 아일랜드 하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한국 역시 세금 천국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인사 청문회만 하면 세금을 저렇게 쉽게 안 낼수 있다는 것을 보곤 놀라곤 하니 말이죠. 과연 세계 속의 한국인을 버진 아일랜드에서 볼 수 있게 될지 궁금합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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