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뇌제 (13)






 26. 오프리치니나 (oprichnina   опри́чнина ) 




 이반 뇌제하면 절대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오프리치니나 (oprichnina   опри́чнина ) 이다. 러시아어로 '떨어져서' 혹은 ' 옆에' 를 의미하는 오프리츠 (oprich) 에서 나온 이 단어는 사실 차르가 설정한 특별 기구와 구역을 의미지만 오늘날에는 스탈린 대숙청 처럼 피의 숙청과 테러, 비밀 경찰에 의해 러시아가 통치된 1565 년에서 1572 년 사이 시절을 의미하는 단어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이반 4 세의 정신 상태가 다소 이상해진 것은 이미 몇년전 부터이긴 하지만 쿠릅스키 공의 배신 이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차르의 망상은 더 체계적으로 강화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망상 뿐만이 아니라 보야르 세력을 눌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차르의 평생의 목표가 담겨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1564 년 12월 3일 이반 4 세는 갑자기 모스크바를 떠났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약 97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알렉산드로프 (Alexandrov) 라는 소도시로 갔다. 지난 수년간 적지 않은 수의 '배신자' 들을 처단하던 차르가 갑자기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자 모스크바의 성직자와 보야르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두려움 반 궁금증 반으로 초초하게 차르의 반응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차르에게서 소식이 온 것은 그런 일이 있은 지 한달이나 후였다. 그것도 차르가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수좌대주교에서 편지 두통만을 썼을 뿐이다. (1565 년 1월 3일) 첫 번째 편지에서 차르는 사회 지도층인 보야르와 성직자들을 비난하면서 제위에서 퇴위할 뜻을 밝혔다. 두 번째 편지에서는 차르가 모스크바 시민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사실 이 시기 보야르와 성직자, 모스크바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너무 뻔했다. 이미 이반 뇌제가 의심스런 측근들을 투옥하고 처형한 것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차르가 물러났겠다고 했을 때 순순히 찬성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스트렐치를 비롯한 군대는 차르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이미 선택지는 결정되어 있었다. 성직자, 보야르, 일반 백성을 할 것 없이 차르가 노여움을 풀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자신들을 다시 통치해 주기를 간청했다. 아마도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피의 보복이 치뤄졌을 지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 차르는 러시아의 국민들이 스스로 멍에를 지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565  2월 차르는 모스크바로 귀환하면서 2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번째 조건은 오프리치니나 (oprichnina) 라는 일종의 군주 직할령을 설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오프리치니나 자체는 이반 뇌제 때 만들어진 신조어는 아니었다. 오프리치니나는 러시아의 공이나 유력 영주가 사망했을 때 그 과부에게 주어지는 독립 토지로 자식들에게 상속되는 토지와 별개의 '따로 분리된 토지' 였다. 하지만 이반 뇌제 덕분에 이 명칭은 이반 뇌제 시절 설치된 군주 직할령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반 뇌제는 이 군주 직할령을 차르의 뜻때로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번째 조건은 더 섬뜩한 내용이었는데 그것은 악한 자들과 배신자들을 차르의 뜻대로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권리를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차르의 의심을 샀던 측근과 귀족, 성직자가 그런 최후를 맞이한 경우는 그 시점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르가 아예 이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이유는 아예 본격적인 숙청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작업어었다. 주위의 어떤 만류나 반대도 듣지 않겠다는 것을 밝힌 셈이었다. 차르는 이미 주위에 배신자들이 넘친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피의 숙청은 불가피 했다.


 우선 오프리치니나에 대해서 말한다면 본래 귀족 과부에게 주어지던 작은 영지를 의미하는 이전의 뜻을 더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광대한 토지가 차르의 직할령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오프리치니나가 많이 설치된 지역은 가장 나중에 러시아에 정복된 지역으로 차르에 대해서 순종적이지 않았던 지역인 노브고로드 공화국 영토였다. 


 노브고로드 (Novgorod) 는 본래 러시아의 분령 시기 동안 꽤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발전시킨 도시였고 그 힘은 모스크바 공국과 견줄 만 했다. 따라서 분령 시기 후반인 이반 3 세 대에 이르러서야 정복되었으나 그 후에도 차르에 그다지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도시라고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오프리치니나는 과거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있었던 러시아 북동부에 많이 지정되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또 이 지역은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무역 도시와 상업 중심 지구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이반 뇌제에게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자신의 직할령으로 편입하는 의미가 있었다. 물론 오프리치니나는 1565 년 이후 급속히 확대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중요성을 기준으로 지정되었다고 단순히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오프리치니나는 적어도 러시아 영토의 1/3 이상에 해당하는 거대한 지역으로 성장했으므로경제적 중심지 외에도 다양한 토지를 포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기존의 행정구역과 나누어 관리했는데 기존의 행정 구역은 젬시치나 (zemshchina) 라고 불렀다. 젬시치나는 보야르 두마를 비롯한 기존의 관료들에 의해 관리되었지만 오프리치니나나 젬시치나나 사실 이반 뇌제의 통치를 받는 영토였다. 중관리가 기존의 보야르 계급 관리인지 차르의 직속인지, 그리고 차르가 오프리치니나라고 명명했는지 아닌지가 차이였다.   


 오프리치니나라는 명칭이 매우 유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행정적인 통치 방식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알려지 있지는 않다. 일단 이반 뇌제가 이 오프리치니나를 통치하기 위해 새로운 부대인 오프리치니키 (oprichiniki,  복수형. 단수형은 oprichnik  오프리치니크) 를 만든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새롭게 오프리치니나로 선포된 지역에서는 기존의 지주와 영주들은 전출되는 운명을 맞았으며 곧 이반 4 세의 새로운 충복인 오프리치니키들이 들어와서 이 토지를 접수했다. 


 오프리치니키는 초기에 1000 명 정도였으며 이후 오프리치니나의 급격한 팽창과 더불어 6000 명으로 확대된다. 이들은 차르의 개인 경호대 역할을 겸하는 직속 종복들로 검은색 옷을 입고 개의 머리와 빗자루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것은 차르의 적을 물어뜯고 쓸어버린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들이 오프리치니나를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차르의 적들이나 혹은 적들로 생각되는 이들을 물어뜯고 쓸어버리는 일 만큼은 확실하게 수행한 것 같다. 보야르들을 처형하고 몰락시킨 후 그 토지를 몰수하고 오프리치니나로 만드는 일은 그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1565 년 이후로 러시아에는 엄청난 피의 숙청이 몰아닥쳤다. 우선 목표가 된 것은 적국으로 달아난 쿠릅스키 공과 관계된 이들이었다. 근대 사회 이전에는 연좌제가 잘 발달되어 죄인이 한명 있으면 가족들까지 참극을 겪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이반 뇌제의 공포 정치 당시에는 그냥 의심만 사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는 것은 물론 그와 연관된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쿠릅스키 공은 적국으로 달아난 것도 모자라 적을 돕기까지 했으므로 그와 연관된 사람들은 대부분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 목표는 앞서 설명한 차르의 사촌인 블라디미르 안드레예비치 (Vladimir Andreyevich, 혹은 Vladimir of Staritsa) 였다. 앞서 이야기한 데로 그는 1553 년 이반 뇌제가 위독할 당시 차르로 추대 될 뻔 했으므로 사실 그 때까지 무사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오프리츠니키들은 블라디미르 공의 궁전을 불태우고 그를 핍박했는데 오히려 빨리 숙청한게 아니라 수년에 걸쳐 계속 감시하고 괴롭혔다. 결국 1569 년에 와서 이반 뇌제는 그와 그의 자녀들을 강제로 독살하고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강제로 익사시켜 딸 한명을 제외하고 그 일족을 모두 몰살시켰다.





(보야르 표도로프 (I. P. Fyodorov ) 를 강제로 차르의 옥좌에 앉히고 위협하는 오프리치니키. 후세의 삽화지만 주변 사람들이 차르의 복장을 하고 앉힌 인물을 조롱하고 위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음. Nikolai Vasilyevich Nevrev (1830–1904) 작. 이런 식으로 차르의 자리를 넘봤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숙청이 이루어졌다. Kyrgyz National Museum of Fine Arts Gapara Aitieva )   



하지만 사실 피의 숙청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수많은 유력 보야르들이 차르의 자리를 넘봤다는 죄목이나 혹은 적과 내통을 했다는 의심만 받으면 (대부분은 누명이었다) 오프리츠니키들에 의해서 본인은 물론 그 가족 친지, 심지어 하인과 농민들까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마치 스탈린 시절의 대숙청 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보야르 계급에 속했다는 이유로 숙청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유도 확실하지 않게 대량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따라서 종종 오프리치니키들은 구소련 시절의 체카나 NKVD 같은 조직의 먼 전신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차르는 한명이고 오프리치니키는 여러명이므로 경쟁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차르의 충복들은 충성 경쟁을 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적으로 차르의 적들을 찾아내 잔인하게 숙청했다. 이 모습 역시 1930 년대 말의 스탈린 치하 소련의 상황과 어딘지 많이 유사해 보였다. 이와 같은 피의 숙청은 처음엔 보야르 계급 및 반대파 숙청에서 시작해서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86431937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enage-girl-years-reconstruct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