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뇌제 (15)






 28. 노브고르드 학살 (Massacre of Novgorod ) 


 이반 뇌제의 치세 가운데 가장 오점으로 기억되는 일은 바로 노브고르드 학살이었다. 노브고르드가 그토록 처참한 학살을 당해야 했어야 하는 이유는 사실 전혀 없었지만 이반 뇌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은 몇가지 있었다. 


 일단 이 도시는 키에프 러시아 (루시) 시절부터 존재한 유서깊은 도시였다. 이반 뇌제의 시기에도 그 역사가 적어도 600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으며 사실 모스크바 보다 더 오래된 도시였다. 또 모스크바는 물론 키에프로부터도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기에 노브고르드는 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치를 형성하며 상당히 오랬동안 독립적인 존재로 지냈다. 이미 몇차례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노브고르드 공화국이라고 부를 만큼 제법 민주적인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상업이 중심이 되었으며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노브고르드는 이런 배경 때문에 이반 3 세의 시절에 와서야 겨우 모스크바에 백기를 들었는데 러시아에 편입된 이후에도 상당히 독립적인 지역의 성향은 없어지지 않았다. 특히 특유의 자유적인 분위기는 전제적인 분위기의 모스크바와는 맞지 않았다. 이반 뇌제는 이전에도 몇차례 노브고르드를 방문한 바 있었고 이런 부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여기에 노브고르드 인들이 이반 뇌제의 노여움을 산 이유는 리보니아 전쟁 때문이었다. 리보니아 전쟁으로 인해서 노브고르드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 상업도시는 전쟁 때문에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전쟁 덕분에 무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전쟁 덕에 경제 사정이 나빠진 것은 러시아 전체의 문제긴 했지만 특히 국경의 상업 도시인 노브고르드의 경우 그 정도가 싶했다.  여기에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서 특별세가 부과되었으므로 노브고르드의 인심은 더 나빠졌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이반뇌제의 편집증적인 의심에 불을 붙였다. 이반 뇌제는 점차로 노브고르드인 들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나갔다. 1569 년 노브고르드에서 수천명을 추방한 후 이반 뇌제는 다른 제보자로부터 노브고로드의 대주교가 폴란드 - 리투아니아에 투항하는 내용의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도시 전체가 폴란드 - 리투아니아에 항복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이 증거는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학살하기에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확실치 않은 증거였다. 하지만 이미 노브고르드인이 자신을 배신하고 적국에 가담하리라고 확신하는 차르에게 그점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차르는 은밀히 노브고르드를 파괴할 준비를 했다.  


 오프리치니나를 주도한 인물들이었던 이반 뇌제의 측근 - 아파나시 비에젬스키 공 (Prinece Afanasy Viazemsky) 과 알렉세이 바스마노프 (Alexey Basmanov) 등 - 조차 사실 이 엄청난 계획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비에젬스키 공의 경우 차르와는 서로간의 비밀이 없을 만큼 친밀한 사이었고 그때까지 수많은 학살에 참여했지만 노브고르드라는 도시 하나를 파괴할 준비를 하는 차르에 계획에 만큼은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노브고르드는 당시 러시아 최대의 상업도시였고 아마도 모스크바를 제외한다면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도시였다. 이를 파괴하게 되면 러시아의 민심은 심각하게 동요하게 될 것이고 오랜 전쟁으로 허덕이는 러시아 경제는 빈사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적의 도시도 아니고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를 그런식으로 파괴하자는 발상은 제대로 된 통치자라면 사실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후세에 그루지아 (조지아) 인간 백정으로 불린 스탈린도 레닌그라드급의 도시 전체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에젬스키 공의 현실적인 판단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당시 차르의 궁정에는 그레고리 로프치코프 (Gregory Lovchikov) 라는 야심가가 있었는데 바로 비에젬스키 공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차르에게 은밀히 사실 비에젬스키 공이 노브고르드 인과 내통하고 있으며 차르가 이 도시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몰래 알려주었다고 - 물론 날조된 음모론이었다 - 비방했다. 


 이미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반뇌제에게 이는 충분한 증거였다. 당시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에 있던 차르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근신하도록 명령했는데 차르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비에젬스키 공은 해명할 겨를도 없이 거의 실성한 상태로 모스크바로 달아났다고 한다. 일단 차르가 의심하면 그 다음에는 무슨 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노브고르드 공격에 소극적이었던 바스마노프 역시 차르로 부터 같은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표도르와 함께 불시에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심지어 아들 표도르 바스마노프의 경우 러시아 남부에서 타타르 족과 대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의 운명은 스탈린 시절 엔카베데 (NKVD) 의 수장으로 수많은 이들을 숙청하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숙청의 대상이 된 겐리흐 야고다나 예조프와 비슷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트 참조 http://blog.naver.com/jjy0501/100065871445 ) 그들의 손에 의해 오프리치니크가 탄생했으나 결국 그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1569 년말에 오프리치니크의 지도부에 큰 공백이 생기자 새롭게 급부상한 인물이 앞서 설명한 말류타 스쿠라토프였다. 그는 어떤 잔인한 학살이라도 이반 뇌제의 마음에 들게 시행했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 출세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오프리치니크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예조프를 몰락시키고 출세한 베리야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류타 스쿠라토프 (서 있는 사람) 과 이반 뇌제 (앉아 있는 사람 ) Иван Грозный и Малюта Скуратов. Ivan the Terrible and Malyuta Skuratov /  Г. Седов. G.Sedov (1836-1884) ) 


 이러는 사이 차르의 망상은 더 거대해져 이제는 노브고르드 하나만 처벌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차르는 이전에 트베리 대공령 (Grand Principality of Tver) 에 속하는 지역, 예를 들어 프스코프 (Pskov) 까지 토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리투아니아와 가깝게 지내긴 했으나 그렇다고 당시에 이들이 모반을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와 내통했다는 차르의 확신은 어떤 증거보다도 더 중요했다. 


 1569 년 12 월 추운 러시아의 겨울에 눈보라를 뚫고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에서 차르의 군대가 진군을 시작했다. 차르가 굳이 이 시기를 택한 이유는 누구도 이 시기에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를 차르가 공격하러 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 1500 명의 소총병을 포함한 15000 명의 정예 부대가 적국인 폴란드 - 리투아니아도 크림한국도 아닌 본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 수도 노브고르드를 공격하기 위해 출전했다. 


 그들이 노브고르드에 도착한 것은 1570 년 1월 2일 이었다. 차르는 1월 6 일 도착했다. 그 후 이들이 도시를 떠나는 2월 12 일까지 엄청난 살육과 파괴가 매일 계속되었다. 노브고르드는 볼크호프 강 (Volkhov River) 을 끼고 있는 도시였는데 시체를 물에 흘려보내는 처리의 용이성 때문에 이곳이 학살의 장소로 애용되었다. 사실 노브고르드의 주민들은 처음에 차르의 엄청난 의도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 별다른 저항없이 차르와 그의 군대를 맞이했다. 심지어 차르로부터 음모의 주도자로 의심받은 주교의 경우에는 차르를 맞이하러 나와서 전통에 따라 차르를 축복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문을 열어주고 성으로 맞이한 차르는 그들을 배반자로 몰아붙이고 증거도 없이 매일 같이 처형을 진행했다. 상당수는 손발이 묶은 채로 강가에 던져저 익사하든지 동사하든지 하는 최후를 맞이했고 일부는 차르가 직접 처형했다고도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상당히 다양한 처형 방법이 사용되어 한달에 걸쳐 노브고르드는 거의 파괴되다 시피했다. 1570 년 이후로 노브고르드는 러시아 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숫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최초의 프스코프 연대기에서는 희생자가 60000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보다는 적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당시 도시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신빙성 있는 숫자로는 2500 - 12000 명 정도가 현재의 역사가들에 의해 거론되고 있다. 다만 도시의 귀족, 상인, 성직자를 포함한 1500 명 정도가 완전히 학살당해 도시가 더 이상 기능을 못하게 된 것은 확실하다. 그외에도 수많은 무고한 이들 (물론 학살당한 이들 모두가 무고한 시민이었다) 이 영문도 모른채 끌려와서 학살당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이반 뇌제의 의심을 풀기는 힘들었다. 다시 이반 뇌제는 돌아오는 길에 프스코프에 들려 같은 방식으로 무고한 이를 수없이 처형하고 모스크바에 돌아와 자신이 의심한 자들을 모두 처형하거나 고문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이반 뇌제의 새로운 충복이 된 말류타 스쿠라토프가 이미 숙청된 전임자들을 대신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학살했다. 


 1570 년은 러시아에서 최악의 순간이었다. 차르의 끊임없는 의심에 의해서 셀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무의미하게 학살당했다. 여기에다 전염병까지 돌아 막대한 인명이 추가로 더 죽었다. 그러나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학살은 그 다음해에 있을 불길한 사태의 전조에 불과했다.


 차르가 반쯤 미쳐 (아니면 정말로 완전히 정신 이상 상태에 빠졌든지 간에) 자기 국민을 학살하고 주요 도시를 파괴한다는 소식은 러시아의 오랜 적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좋은 이반의 통치 시기 남쪽으로 밀려난 타타르 족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로 생각될 수 밖에 없었다.

 크림 한국에 있던 타타르 족과 기존의 아스트라한 한국과 카잔 한국에서 내려온 타타르 족, 그리고 이들을 돕는 오스만 제국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지원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순망치한이라고 실제로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당하고 난 후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은 서로 힘을 합쳐 러시아에 묵은 원한을 갚을 준비를 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enage-girl-years-reconstruct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