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시베리아로의 진출
러시아 역사에서 이반 뇌제 재위 후반기에 이뤄진 가장 중요한 일은 사실 리보니아 전쟁에서 패전한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 진출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는 앞서 몇차례 강조했듯이 러시아의 동남쪽을 가로 막고 있던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점령하므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볼가 강 유역을 장악한 후 러시아는 우랄 산맥 너머의 광대한 시베리아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반 뇌제가 리보니아 방면에 집중하기로 한데다 당시 이 지역은 러시아 중심부에서 너무 멀어서 실제로 탐사와 개발이 이뤄진 것은 한참 후였다.
1558 년 카잔 한국의 점령 작업이 마무리 된 후 이반 뇌제는 당시 러시아의 부호 중 하나인 아니케이 표도로비치 스트로가노프 ( Anikey Fyodorovich Stroganov Аникей Фёдорович Строганов 1488 - 1570) 에게 우랄 산맥 너머의 광대한 지역에 대한 모피, 제염, 광업, 어업, 농립 산업등의 개발권을 주었다. 이것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의 시초로 당시에는 이 지역에서 나오는 모피 등의 상품이 주 목적이었다.
당시의 시베리아는 지금보다 인구 밀도가 매우 희박한 지대로 몇개의 타타르 한국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였다. 그 중에서도 카잔 한국의 북동쪽 경계를 흐르는 카마 (Kama) 강 너버에는 시비르 한국 (Khanate of Sibir) 가 있었다. 시비르 한국은 이슬람화 된 타타르 부족으로 몽골 - 투르크 부족들이 합쳐져 만들여진 혼성 부족이었다. 대략 15 세기에 시베리아 서쪽에 세워진 이후 1493 년 시비르 (Sibir) 를 수도로 삼았고 이후 시비르 한국이라고 불리게 된다.
(볼가 강으로 흘러드는 카마 강은 당시 카잔 한국의 북동쪽 경계였다. 그리고 이 너머는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였다. 당시 이 영토 너머에는 시비르 한국이 있었다.
(시비르 한국의 영토. 초기 수도는 Toman 이라고 표시된 Tyumen 이었고 현재는 없어진 Sibir 는 Qsaliq 라고 표시되어 있다. Public domain image )
(현재 러시아에서 위의 지도에 별표로 표시된 도시들이 있는 튜멘주 (Tyumen Oblast) 는 지도에서 붉은 색 부분이다. 시비르 한국은 두 지도를 비교하면 그 영역이 지금의 시베리아 서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File:Map_of_Russia_-_Tyumen_Oblast_(2008-03).svg )
러시아와 국경을 맞닿게 된 운나쁜 시비르 한국의 마지막 칸은 쿠춤 칸 (Kuchum Khan) 이었다. 그는 1563 년 이후로 전쟁에서 승리해 칸의 위치에 올라섰는데 당연히 이웃인 카잔 한국의 점령은 그에게도 상당히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다행히 한동안 이반 뇌제가 내부 숙청과 리보니아 전쟁에 집중하면서 무사할 수 있었다.
시비르 한국의 위기가 찾아온 것은 사실 차르 이반 4세의 뜻이 아니라 스트로가노프와 볼가강에서 해적 노릇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카자흐 (Cossack) 두목 에르마크 (Yermak) 덕분이었다. 예르마크 티모페에비치 (Yermak Timofeyevich 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 ) 은 돈 강 유역 출신의 카자흐족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반적으로 카자흐 족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말이 아닌 배를 이용해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처음 도입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실 러시아는 강을 따라 발전한 나라였다. 러시아의 남북과 동서로 흐르는 강들은 이 광활한 나라에 중요한 교통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한때 리보니아 전쟁 참전 용사였던 예르마크 역시 스트로가노프 밑에서 일하면서 카마 강과 볼가강을 따라 소금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에 실증을 느낀 예르마크는 전쟁 당시 경험을 살려 갱단을 조직해 볼가강 및 돈강으로 무대를 옮겨 활약했다. 예르마크라는 이름 역시 본명이 아니라 도적단에서 얻은 별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 강 해적 (river pirate) 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에는 강을 따라 교역이 많이 이뤄졌으므로 그다지 드문 것은 아니었다.
(17 세기 예르마크의 상상도. 사실 예르마크의 초상화 같은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상상화의 예르마크가 마치 스페인 정복자 처럼 그려졌다는 점이다. 이 그림은 후세의 연대기에 등장한다. Public domain image )
1577 년 과거 예르마크의 고용주였던 스트로가노프는 그를 다시 고용했는데 이번에는 상품 수송이 아니라 카마 강 너머에 있는 그의 영지를 시비르 한국의 타타르 족으로 부터 방어하는 일이 주어졌다. 스트로가노프는 편집증적인 의심으로 뭉쳐진 이반 뇌제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당시 시베리아 근방의 구 카잔 한국의 영토에서 넓은 영지를 확보했다. 그 중에서 카마 강 유역의 페름 (Perm) 은 스트로가노프의 주요 근거지였으나 시비르 한국과는 바로 옆이었다. (제일 위에 있는 지도에서 위치 확인)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예르마크를 고용한 것은 의도치 않게 세계사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사실 이반 뇌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스트로가노프는 러시아 국경 서쪽에 대한 개발권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스트로가노프는 내친 김에 시비르 한국에서 영지를 방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베리아의 자원을 탐사하고 이를 이용하기 원했다. 차르는 혼쾌히 토볼 (Tobol) 강과 이르티슈 (Irtysh) 강에 대한 개발권도 내주었는데 사실 이곳은 러시아 영토가 아니라 쿠춤 칸의 영토였다. 그러나 무슬림 타타르족이었으므로 차르에게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차르는 스트로가노프에 대해서 미미한 지원만을 해줄 뿐이었으므로 이 원정은 스트로가노프가 후원하고 예르마크가 이끄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토볼 강과 이르티슈 강 의 위치. 시비르는 이 두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대략 1579 년에서 1581년 사이 예르마크가 이끄는 카자흐 부대가 지금의 우랄 산맥을 너머 시베리아로 진입했다. 약 540 명 정도의 카자흐들이 그를 따랐는데 스트로가노프는 추가로 전쟁 포로 300 명을 포함해서 여러 보급품을 주며 이들을 지원했다. 시비르 한국의 존재는 이전부터 알려져 있지만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희박하고 러시아는 물론 외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예르마크가 시비르 한국이 차지한 시베리아 서부 (라기 보단 사실 거대한 시베리아 어딘가에 시비르 한국이라 불리는 타타르 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로 들어간 시점은 역사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추산하는데 아무튼 1579 년에서 1581 년 사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카자흐 하면 떠오르는 말이 아니라 배를 타고 강을 따라 광활한 시베리아를 빠르게 이동했다. 이것이야 말로 거대한 침엽수림이 우거진 시베리아에서 길을 잃지 않고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예르마크의 상대인 시비르 한국의 타타르 족들은 사실 시대에 매우 뒤처져 있었다. 이들은 외부세계에 고립되어 화약 무기의 존재는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총포로 무장한 예르마크의 카자흐 부대는 이들을 만날 때 마다 손쉽게 승리를 거두며 우랄 산맥 너머의 여러 강의 지류를 타고 이동하면서 탐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토볼 강을 타고 마침내 시비르 한국의 가장 중요한 마을과 도시들에 이르게 된다.
예르마크의 부대가 강을 타고 자신의 수도인 시비르 (Sibir, 혹은 Qashliq, Isker ) 까지 도달하자 쿠춤 칸과 그의 원주민 타타르 부대는 시비르 인근의 추바쉬 산 요새에서 저항했다. 1582 년 10월에 일어난 이 전투의 분수령은 카자흐 부대의 공격에 맞서 쿠춤 칸이 대대적인 반격을 한 추바쉬 곶 (Battle of Chuvash Cape. 1582 년 10월 23일) 전투였다.
(예르마크의 시비르 한국 원정. 1895 년 바실리 슈리코프 작. 이 그림에서도 총포로 무장한 카자흐 군대와 활로 무장한 원주민 군대와의 싸움이 묘사되어 있다 Vasiliy Surikov, "Yermak's conquest of Siberia". Canvas, oil. 5.99*2.85 m large. public domain image )
쿠춤 칸의 타타르 전사들은 활로 무장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대규모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냥꾼들이었다. 처음에는 나무 사이에 숨어서 카자흐 부대의 총포 공격을 피하면서 화살을 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방진을 이뤄서 질서 정연하게 화약 무기로 응전하는 카자흐 부대가 유리해졌다. 카자흐 부대는 따라간 보조 부대를 합쳐도 800 명 수준이었고 공격하는 원주민 부대는 수천명에 달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불명) 결국 화약 무기가 승리했다. 다만 불리한 위치에서 싸운 예르마크 부대의 희생도 상당했다.
예르마크 부대가 10월 26 일 시비르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그곳은 버려져 있었다. 쿠춤 칸은 시베리아 더 깊숙한 곳으로 피신해 한동안 저항하긴 했지만 이미 예르마크 부대의 따끔한 맛을 본 현지 원주민들은 더 이상 그를 잘 따르지 않았다. 이 전투 이후 적지 않은 원주민 족장들이 예르마크에게 복종의 의사를 밝혔다.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은 그 성격이나 이후 역사에 미친 영향에서 거의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에 견줄만한 사건이었는데 결국 이를 통해 광대한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일부가 된다.
예르마크는 이 축전을 차르 이반 뇌제에게 보냈는데 그 소식이 모스크바에 당도한 것은 생각보다 빠른 1583 년 초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반 뇌제는 매우 크게 기뻐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교회의 종이 울리고 시민들이 나와서 이 소식을 축하했다. 러시아 백성들은 '신이 러시아를 위해서 새로운 왕국을 내주셨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리보니아 전쟁에서의 치욕적 패배를 겪었던 러시아 국민들은 이 소식에 환호했다.
이반 뇌제는 예르마크를 위해 후한 상을 내리는 것은 물론 그의 스트렐치 부대를 보내 예르마크를 돕도록 했다. 사실 예르마크 본인은 복수를 위해 다시 시베리아 스텝에서 병력을 모아온 쿠춤 칸의 기습으로 사망했다. (야간에 기습을 당했는데 도망치는 과정에서 무거운 체인 메일로 인해 강에서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시기는 1584 년이나 1585 년 8월 4일에서 5 일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르마크는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이 되었다. 러시아 곳곳에 위치한 그의 수많은 동상이 그점을 증명한다.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과 개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반 뇌제의 기념물을 찾기는 그렇게 쉽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예르마크의 위상을 쉽게 알 있다. 수많은 러시아 소설, 영화, 시, 노래에 예르마크의 이름이 등장한다.
( Statue of Yermak in Novocherkassk. public domain image )
예르마크의 시비르 한국 원정이후 이반 뇌제도 시베리아 진출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지원했지만 사실 1584 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반 뇌제의 시대에 대대적인 진출이 이뤄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반 뇌제의 시기는 러시아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러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될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의 러시아의 팽창
이반 뇌제의 카잔 정복부터 표트르 대제의 집권기 까지 러시아는 매년 3.5 만 제곱 킬로미터씩 영토가 팽창했다. 사실 이반 뇌제의 사후 100 년이 채 안되서 러시아는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반 뇌제가 그토록 갈망한 남한이나 포르투갈만한 면적의 발트해 연안 영토 확보를 위한 리보니아 전쟁은 실패했지만 대신 본래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시베리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도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나는 막대한 자원은 현재의 러시아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90069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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