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사에서 사실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과는 별 상관없기는 하지만 후세에 여러 이야기를 남긴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년 십자군이다. (사실 영어로는 Children's Crusade 인데 국내 번역에서는 어린이 십자군 보다는 소년 십자군이 더 자주 언급되어 소년 십자군으로 통일) 이 이야기는 십자군 원정 자체와는 별 관계없는 이벤트이지만 중세 십자군 운동의 한 단면을 소개시켜 준다는 의의가 있어 소개해 본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사실은 과거 믿어졌던 전승으로의 소년 십자군은 오늘날 와서 상당부분은 픽션으로 생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후세에 여러 전승은 존재하지만 당대의 신빙성 있는 기록들과 다른 연대기를 조합한 결과 대부분은 사실에 기반을 둔 픽션이나 완전한 픽션으로 생각된다. 일단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년 십자군 이야기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독일 쾰른의 니콜라스와 프랑스 방돔의 에티엔 (혹은 스테판 ) 이다.
쾰른의 니콜라스 이야기는 왠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다. 전설에 의하면 니콜라스는 라인란트 지방의 양치기 소년이다. 1212년 니콜라스는 하늘의 계시를 받고 자신이 알프스를 넘어 성지를 향해 가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는 언변이 매우 뛰어났는데 지금같으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엔 수많은 사람들이 이말을 믿고 니콜라스를 따라 남쪽으로 행진했다.
왜냐하면 당시 부랑민 및 고아들이 사방에 넘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희망도 비전도 없었으므로 쉽게 이런 무리에 휩쓸려 군중을 이루는 것이 다반사였다. 사실 이와 비슷한 일은 중세에 그렇게 드물지만은 않았는데 솔직히 1차 십자군에 앞서 일어난 민중 십자군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더 대규모라는 점과 지도자가 피에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민중 십자군에 대해서는 이전에 십자군 전쟁사 초기에 쓴 내용을 참조)
아무튼 니콜라스의 무리 역시 곧 다양한 고아와 부랑민에서 떠돌이 수사와 기사들까지 포함해 꽤 거대한 무리로 커졌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 무리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1212 년 봄 쾰른 이었고 이내 독일을 가로지르며 무리가 2만명으로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행군 끝에 2/3 는 죽거나 집으로 돌아갔고 이들이 8월경에 제노바에 도달할 때 쯤이면 그 수가 대략 7000 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 전승에 의하면 이들 중 일부는 무리에서 이탈해 노예로 팔려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 소년 십자군. 19 세기의 상상도로 여기에서는 거의다 소년 들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여기서 그들은 바로 항구로 직행했는데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바다가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무리의 많은 이들이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부는 니콜라스를 기소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흩어졌지만 니콜라스와 이 무리의 돈독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은 신께서 뜻을 바꾸었다고 믿고 다시 피사로 행진했다. 물론 피사에서도 바다가 갈라지진 않았다. 이후 극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접견하고 환대를 받았으며 해산했다는 설과 기타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이들의 이야기는 마무리 짓는다. (물론 공식 기록에 교황이 이를 접견했다는 기록은 없다)
한편 프랑스의 방동 지역에의 에티엔 (혹은 스테판) 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그 역시 구전에서 흔히 전하듯 양치기 소년이다. (그러고 보면 구전 동화의 단골 주인공이 바로 양치기 소년이다) 그 역시 프랑스에서 꿈속에서 예수의 계시를 받고 프랑스 국왕 필립 2세에게 전달할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에 따라 그가 직접 국왕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도 물론 국왕을 접견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그가 이끄는 무리는 약 3만에 달했다고 하며 방돔과 마르세이유 근방에서 행진하다가 대부분은 집에 돌아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로 잡혀 팔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 역시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이루겠다고 했던 이야기도 있는데 니콜라스의 경우와 비슷해서 한 이야기를 둘로 나눈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일단 이 이야기가 내용 그대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이유는 동시대에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 후세의 각 저자들 마다 이들의 구체적인 행보와 운명이 다 다르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소년 십자군 이야기가 진짜였다면 적어도 동시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자세히 적는 연대기 작가들이 이를 기록하지 않았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교황이나 국왕을 만났다면 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상세한 기록이 남게 마련이다.
서양 중세시대는 초기 암흑기라고 부를 시기를 제외하면 10 - 11세기 이후로는 역사 기술이 매우 자세하기 되어 있다. 오히려 동시대의 고려사에 비해 더 상세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그것은 동시대에 활약하던 연대기 작가들이 매우 상세한 기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도 당시에 살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꽤 상세한 십자군 전쟁사를 저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동시대 기록은 없고 후세의 작가들에 의해 기록된 이야기들만 (그리고 그것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존재한다.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있었던 일에 기반했을 지라도 어느 정도 부정확한 창작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군주나 교황 주변에서 일어난 연대기를 직접 기록한 작가나 혹은 많은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처럼 종군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경우는 꽤 신빙성이 있지만 이 소년 십자군 이야기는 직접 보고 들은 기록도 없고 후세의 기록들도 서로 엊갈린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소년이라는 단어 역시 오류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라틴어 pueri 는 소년을 뜻하기도 하고 어린이를 뜻하기도 하지만 속어로 건들거리는 어른들, 즉 부랑민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어린이 혹은 소년 십자군이 탄생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민중 십자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중세에는 꽤 부랑민 들이나 이들을 선동하는 떠돌이 수도승의 존재가 드물지 않았다. 당시의 십자군 운동 분위기 탓에 성지로 가겠다는 군중의 무리 역시 드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론 진짜 성지까지 살아서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중간에 해산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와전되면서 현재의 소년 십자군의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 생각되고 있다.
다만 규모는 이보다 작더라도 계시를 받았다는 소년이 나타나 이런 군중의 무리들을 이끌었다는 것도 가능한 해석이긴 하다. 따라서 이 소년 십자군은 실제와 허구가 섞여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허구와 사실의 % 가 얼마만큼 인지는 알기 힘들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소년 십자군의 이야기는 허구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앞서 일어난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이나 다음에 설명할 알비주아 십자군의 이야기는 꽤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음에는 알비주아 십자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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