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220 년의 상황
1219 년 말 다미에타 함락이후 5차 십자군은 한동안 소강 상태에 빠진다. 물론 유럽에서 (결국 6차 십자군 때 올 것이었지만) 올 것이라 굳게 믿은 프리드리히 2세의 대군을 기다리면서. 본래 5차 십자군은 이시기에 병력의 상당 부분이 귀국해서 그 규모가 줄어 있었으나 유럽에서 현지 사정을 잘 모르고 오는 새로운 십자군 병력들과 3대 기사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다행히 병력 규모가 심각하게 줄어들진 않았다.
1220 년이 시작되자 오만하고 독선적인 (그리고 이교도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와 비록 현재는 명목상의 자리이긴 해도 그래도 경험이 풍부한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의 갈등도 가라앉았다. 그 이유는 둘의 사이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실리시아 아르메니아 (현재의 아르메니아가 아니라 지금의 터키 남부 해안 지역의 실리시안 아르메니안 왕국 (Armenian Kingdom of Cilicia) 이다. 과거 비잔티움 제국 시절 많은 아르메니아 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했음. 이 실리시안 아르메니안 왕국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십자군 전쟁사에서 몇차례 언급했음. ) 왕국의 변화 때문이었다.
과거 십자군 전쟁사에서 언급했던 실리시아 아르메니아의 군주 레오 1세의 손자인 레오 2 세는 아르메니아의 군주 (Lord of Armenian cilicia) 에서 스스로 왕 (King of Armenia Cilicia) 으로 승격해서 주변에까지 꽤 힘을 떨친 군주였다. (아르메니아 군주로는 레오 2세지만 왕국으로 승격한 이후에는 레오 1세나 혹은 Levon I, Lewon I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그의 딸인 스테파니에 공주가 바로 장 드 브리엔과 재혼했는데 1220 년 6월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둘 사이의 어린 아들도 죽고 말았다. 사실 레오 2세는 아들 없이 딸 둘 밖에 없었고 스테파니에 공주가 장녀였으므로 장 드 브리엔은 둘 사이의 어린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 모자가 둘다 죽고 말았으므로 이제 실리시아 아르메니아에서 그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하지만 레온 2세가 1219 년에 죽은 후 아르메니아가 혼란에 빠졌고 차녀인 이사벨라는 매우 어렸기 때문에 장 드 브리엔은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팔레스타인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 다미에타에는 왕이나 그에 견줄 만한 대영주가 없게 되었다. 3대 기사단 (튜튼, 구호, 성전) 은 본래 교황에 대해서 충성을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으로 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은 펠라기우스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즉 다미에타의 십자군에 명령을 내릴 사람이 추기경 한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3대 기사단을 단장들을 비롯한 여러 기사들은 펠라기우스의 속물 근성과 무능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아마도 장 왕이 자리를 비운 것은 이런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다 펠라기우스가 아무리 무모해도 프리드리히 2세가 당도하기 전까진 이집트 내륙으로 진군하려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다.
17. 카이로 공세
1221 년 여름이 지나기전 펠라기우스도 이제 프리드리히 2세가 성지로 오지 않을 것임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로 말할 것 같으면 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그토록 분열 시키고자 노력했던 신성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온 힘을 다 쏟고 있었다.
1220 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써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른 프리드리히 2세는 같은 해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를 시칠리아 국왕에서 독일 국왕으로 임명하고 독일 통치를 위임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시칠리아로 건너가 자신의 독일로 간 사이 혼란 상태에 빠진 시칠리아 왕국의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이제 시칠리아에서 북독일에 이르는 거대한 단일 제국을 건설하려는 프리드리히 2세의 야심을 모르는 이는 없게 되었고 펠라기우스 역시 더 이상은 프리드리히 2세를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펠라기우스는 이에 십자군에게 내륙으로 진격해서 적의 수도인 카이로를 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사단과 기사들도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적어도 장 왕이 다시 올 때 까지만이라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이로와 다미에타는 적어도 직선 거리로만 100km 이상 떨어져 있었으며 실제로는 수많은 지류가 있는 거대한 나일 삼각주를 지나야 했는데 특히 이 지류들은 우기에 나일강이 범람하기 전까지는 물이 흐르지 않는 마른 강이거나 혹은 얕은 개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단 범람하면 이 지류들은 배 없이는 지나는 일은 불가능한 큰 강으로 변신했다. 따라서 잘못 들어갔다가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함정으로 변신했다.
(나일 삼각주의 위성 사진. 붉은색으로 표시한 지점이 다미에타이고 노란색이 카이로가 있는 지점이다. 둘 사이는 100km 도 넘게 떨어져 있고 여기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나일강이 세계에서 가장 큰 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구도 상상하기 힘들만큼 크다. 삼각주에는 수많은 지류가 형성되어 있다. )
따라서 카이로로 진격하려면 아예 1160 년대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시처럼 삼각주를 우회기동하든가 아니면 강이 범람하지 않는 시기를 택해야 했다. 당시엔 범람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사실 빨리 진군하든지 내년에 진군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급거 다미에타로 돌아온 장 왕은 이미 추기경이 진격하려고 마음을 굳힌 것을 알고는 놀랬다. 추기경은 내년 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으며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 장왕이 끝까지 반대했더라면 추기경도 자신의 뜻만으로 군대를 진군시키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저 오만 불손한 추기경이 원정이 실패한 책임을 장 왕 때문이라고 모두 뒤집어 씌울 가능성이 있었다. 잘못하면 오랜 세월 우트르메르에서 자신이 쌓아왔던 명성을 한번에 날릴 수도 있었다. 거기에 추기경의 집요한 설득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장 왕도 카이로 공세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장 드 브리엔과 펠라기우스가 동의하니 결국 십자군은 1221 년 7월에 카이로를 향해 내륙으로 진격했다. 진격할 당시에는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아서 진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병사들이 자신들이 건넌 얕은 도랑과 개울이 나중에 돌아갈 수 없는 강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곤 알 지 못했다.
18. 재앙의 끝
1221 년 8월에 십자군이 카이로 인근까지 도달했을 때 현 상황이 승리가 아닌 패배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알 카밀은 함정으로 제발로 걸어들어오는 십자군 군대를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거점 보급 기지이자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항구인 다미에타에서 십자군이 멀어질 수록 그들은 재앙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알 카밀의 군대는 현명하게도 정면 승부를 하는 대신 게릴라 전법으로 군대의 측면을 노리고 기습과 후퇴를 반복했다. 삼각주 지형에 익숙한 그의 군대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 감을 깨달은 일부 독일 군대는 다미에타로 후퇴해서 늦기전에 그들의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장왕과 주요 기사단 역시 사태가 점점 심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하자 삼각주 지형에 익숙치 않고 배도 없는 십자군은 꼼짝없이 섬 사이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기가 되자 이집트 군의 활동이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본래 이집트는 나일강의 편리한 해상 수송로를 역사적으로 잘 활용해 왔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석재들도 대개 나일 강을 이용해서 수송했을 만큼 나일강은 농업은 물론이고 물류 수송에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강이었다. 사실 이집트의 주요 도시들이 대부분 나일강이나 그 지류에 건설된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만큼 나일 강이 범람하자 이제 이집트 군은 정박해 놓았던 배를 이용해서 삼각주에서 아주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로 같은 삼각주 지형에 익숙했므로 십자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쉽게 적을 공격했다 따돌릴 수 있었다. 물론 십자군이 삼각주에서 빠져나갈 길을 모두 막아버린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정이 이쯤 되자 펠라기우스도 상황의 심각성을 곧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후퇴를 하려고 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곧 십자군에는 어떻게든 필사의 퇴각전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벌어진 혼란상은 사실상 십자군이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부 십자군 부대들은 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군수품 가운데서 포도주 (오늘날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당대에는 깨끗한 물을 장기 보존하거나 혹은 현지에서 식수를 구하기 힘든 경우도 있었으므로 술도 식수처럼 사용되었다) 를 몽땅 다 마셔버렸다. 그 결과 너무 취한 병사들이 퇴각은 커녕 바로 서서 걷기도 힘든 추태를 연출했다.
일부 부대들은 독단적으로 식량과 비축 군수품을 태우거나 못쓰게 만들었으므로 장왕과 추기경이 결정도 하기 전에 퇴각은 기정사실이 되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진짜 퇴각이 가능하냐의 문제였다. 나일강이 범람한 것은 물론이고 알 카밀은 수문까지 모두 열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배 없이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던 알 카밀은 충분히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겼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십자군을 궤멸시킬 공세를 준비했다. 알 카밀의 마지막 공세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야간 기습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미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십자군이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고 퇴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 펠라기우스도 뒤늦은 화평제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시기 이루어진 것은 화평이라기 보단 그냥 항복이었으나 자신의 삼촌인 살라딘의 선례를 따랐는지 알 카밀은 매우 관대하게 이들이 살아서 나갈 수 있도록 선처했다. 대신 다미에타는 돌려줘야 하고 8 년간 상호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알 카밀 입장에서는 이들을 모두 살육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평화 협상을 더 갈망했다. 유럽에서 대규모 군대가 새롭게 조직되어 오는 것 보다는 그게 더 좋은 방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알 카밀은 하틴 전투에서 상실한 참 십자가를 돌려주기로 약속하므로써 (3차 십자군 때 부터 반환할 것을 십자군 측에서 요구해 왔다) 자신의 큰 배포와 평화를 위한 열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낭패스럽게도 마침 돌려주려고 보니 참 십자가가 어딘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이슬람 교도들에겐 전혀 중요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참 십자가의 조각이라고 여겨지는 성 유물들은 꽤 많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의 주요 교회 가운데는 이를 보관하는 곳들이 꽤 된다)
19. 결과
이 5차 십자군은 크게 두개의 군대로 나누어 생가할 수 있다. 하나는 전반기에 안드레 2세가 이끄는 헝가리 군이 주축이 된 십자군으로 안드레 2세 본인이 병에 걸려 쓰러지는 바람에 별 소득 없이 귀국한 군대가 있다. 두번재는 장왕, 3대 기사단, 기타 독립적인 십자군, 영주들 이 모이고 추기경 펠라기우스가 간섭한 십자군이었다.
첫번째 십자군의 경우 아마 안드레 2세가 건재했다면 성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이미 무슬림들 조차 예루살렘을 포기할 준비를 할 정도로 안드레 2세가 아무 피해 없이 정예 병력을 상륙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베네치아의 해상 수송력이 이미 중세시대에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유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을 다시 완전한 형태로 재건하지 않는 이상 이를 계속 유지하긴 어려울 텐데 안드레 2세가 이 과제를 모두 달성하려면 몇년 정도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병이 아니더라도 본국을 그렇게 장기간 비우지 않고 귀국했을 것이고 결국 예루살렘 왕국은 이전보다 꽤 축소된 상태로 재건되었을 것이다.
두번째 십자군의 경우에는 사실 이집트 정복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집트는 그렇게 작은 국가가 아닌데다 지형상 쉽게 외세가 침입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론적으로야 아이유브 제국의 심장부를 먼저 공격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예루살렘 수복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반환하겠다고 했을 때 차라리 그 정도로 만족했다면 교황의 위신도 더 살아날 수 있었을 텐데 추기경 펠라기우스의 무리한 욕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틀어졌고 재앙적인 결말만을 맞게 되었다.
따라서 5차 십자군 이후 교황과 교황의 전권을 위임 받았던 펠라기우스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했다. 이 재앙적인 전쟁 이후에 교황권이 급격히 추락한 건 아니지만 새로운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견제와 연이은 십자군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권위가 퇴색한 건 사실이었다.
(한가지 불공평한 일은 재앙의 구렁텅이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밀어 넣었던 펠라기우스 본인은 무사히 살아서 유럽으로 귀국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차에서 5차에 이르는 십자군의 사실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직 십자군 전쟁 자체가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은 정치적으로 이용할 여지가 적지 않았기에 십자군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다음 부터는 5차 십자군 전후의 우트르메르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고 이후 6차 십자군과 프리드리히 2세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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