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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6 차 십자군 4




 8. 예루살렘 반환


 알 카밀은 사실 5차 십자군 시절 부터 서방의 가장 강력한 군주라고 일컬어지는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당시엔 물론 그가 이집트를 침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의견을 교환할 기회가 없었고 6차 십자군이 시작될 무렵에야 이들이 서신으로 왕래를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 서신을 교환한 알 카밀은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아라비아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선진 문화인 아랍 문화와 고전 문화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대까지도 문맹인 기사가 드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중세 당시 역사를 기록한 인물들이 주로 성직자 (수도사) 인 이유도 사실 기사나 영주들 가운데 문맹이거나 혹은 문맹이 아니더라도 겨우 읽고 쓰는 수준 밖에 안되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3 세기 정도 되면 암흑기라고 부를 만한 5 - 10 세기 시절과는 달리 중세도 고도화 되긴 하지만 당시에도 중세 서유럽 문명은 그다지 앞선 문명이라고 할 순 없었다. 특히 당대에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서구 문명을 은근히 깔보기 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십자군 하면 당대 무슬림 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야만족으로 생가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수장이라는 프리드리히 2세는 정말 엄청난 학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알 카밀은 곧 서신 왕래를 통해 프리드리히 2세를 100 년 지기 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왠지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영혼의 불멸성, 우주의 기원등에 대한 서로의 학식과 견해를 적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우의를 다졌다. 그야 말로 왕좌에 앉은 첫번째 근대인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행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 2세가 지금까지 그가 생각해 왔던 광신적인 십자군 전사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적어도 펠라기우스 처럼 충분히 유리한 조건에서도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예 이교도와는 협상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2세 (왼쪽) 와 악수하는 알 카밀 (오른쪽)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알 카밀이 자신이 당시 빼앗긴 후 다시 회복한 영토인 예루살렘을 반환할 이유는 없었다. 예루살렘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던 장소로 사실 이슬람 교에서도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더구나 불경스런 프랑크인 (당시 무슬림 들은 십자군들을 그렇게 불렀다) 들이 장악했던 도시를 위대한 영웅 살라딘이 다시 수복했던 것이며 알 카밀은 그 살라딘의 조카가 아닌가 ? 


 어렵사리 얻은 성스로운 도시를 적에게 화살 한발 안쏘고 양도한 다는 것은 설령 알 카밀이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고 해도 주변의 반대가 극심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알 카밀은 고민한 끝에 좀처럼 역사에 없는 평화적 예루살렘 양도를 결심한다. 예루살렘 뿐 아니라 베들레헴, 나사렛, 몽포르, 토론 등 주변에 있는 땅도 같이 양도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 영토는 바다 쪽으로 좁은 띠같은 구조로 방어에는 취약해 보였다.  


 이렇게 알 카밀이 평화적 영토 양도라는 좀처럼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을 진행한 이유는 알 무아잠 및 알 아슈라프를 대신 상대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들이 서로 팔레스타인에서 엉켜서 싸우는 동안 이집트는 안전할 것이라는 게 알 카밀의 바램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알 카밀만의 생각이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연히 예상할 수 있듯이 분노와 비난의 여론이 이슬람 사회를 휩쓸었다고 한다. 이 도시는 1099 년 불경스러운 프랑크인들에게 점령당했을 때 엄청난 유린과 살육이 벌어진적이 있지 않은가 ? 술탄은 그 일을 다시 반복하려 하는 것인가 ? 무슬림의 성전인 알 아크사 사원과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바위 신전을 다시 더럽히는 역사를 반복하려 하는 것인가 ? 


 하지만 이와 같은 무슬림 사회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살육과 약탈에 굶주린 1차 십자군과 같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수용성과 신앙과 사상의 자유였다. 


 9. 예루살렘 입성


 황제는 이렇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곧장 성도 예루살렘을 회복했다. 만약 펠라기우스가 조금만 합리적으로 생각했다면 이 업적은 그가 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협상은 1229 년 2월 18일 타결되었으며 10년간 유효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3월 17일 이었다. 2차 십자군 이후 처음으로 서방 황제가 이 도시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가 다시 기독교 측에 돌아왔다고 해서 무슬림들이 박해를 받거나 아니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피신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당시 타 종교를 향한 황제의 관대함을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몇가지 있다. 


 황제가 예루살렘에 당도한 저녁 프리드리히는 무슬림들에게 기도할 시각을 알리는 사람인 무에진 (Muezzin) 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음을 알게되었다. (이말은 황제가 이미 무슬림들의 풍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를 주위에 물은 결과 무슬림들이 황제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즉시 무에진이 그 일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 짐이 이 도시에 온 것은 바로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소 " 


 그것이 서방 세계의 수장인 프리드리히 2세가 한 말이었다. 황제는 입성 다음날 살라딘에 의해 복원된 알 아크사 사원과 바위 신전에 구경하면서 정교한 이슬람 건축 기술에 크게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과거 1099 년 십자군들의 살육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의 피로 넘처났던 그 장소가 이제는 평화로운 관광지가 된 듯 한 모습이었다.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모스크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Barbara Kabel )

 그런데 그 순간 황제를 수행한 한 수도사가 복음서를 들고 이 사원에 들어왔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기독교 성직자가 이 사원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크게 꾸짖었다. 이는 물론 알 카밀에게 약속한대로 무슬림들에게도 중요한 이 도시에서 그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황제의 배려였다. 

 본래 알 아크사 사원은 솔로몬 성전 위에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예루살렘 왕국 당시 성전 기사단이 이곳에 자신의 본부를 두고 (그래서 명칭이 성전 기사단)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 곳을 계속해서 무슬림의 성전으로 남겨두고자 했다. 결코 무슬림 성직자들이 이 사원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성전 기사단은 황제에 대해 큰 반감을 품게되었다. 


 아무튼 3월 18일에 황제의 예루살렘 국왕 즉위식이 열렸다. 본래 섭정의 자격이었으나 황제는 자신을 그냥 국왕도 겸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도 파문을 당한 몸이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황제를 수행하기 거부했다고 한다. (혹은 왕관을 넘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황제는 그냥 스스로 관을 쓰고 왕좌에 올라 자신이 예루살렘 국왕을 겸했음을 선포했다. 튜튼 기사단은 황제를 충실히 따랐다. 


 이렇게 6 차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 그것은 십자군 원정 전체에서 보기 드문 것은 물론이고 세계 전쟁사에서도 보기 드문 방식으로 결말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희생없이 예루살렘을 수복했음에도 우트르메르의 서방 세력들은 황제를 지지하지 않았다. 황제의 방식은 당시 십자군 식으로 말하면 이단이었고 적과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장 디블랭과의 껄끄러운 관계는 결국 전쟁으로 발전할 것이었다. 


 아무튼 황제는 이렇게 성지 회복이라는 일차 목표를 달성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운 후 급거 이탈리아로 귀국했다. 거기서 황제는 교황을 지지하는 군대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7 차 십자군을 말하기 전에 6차 십자군과 7 차 십자군 사이 (1229 - 1248) 사이 기간의 우트르메르와 프리드리히 2세의 상태를 언급할 것이다. 

 6차 십자군을 끝내기 전 더 언급할 내용은 황제는 심지어 파문을 당한 상태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일은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이후 십자군들은 점점 교황보다는 군주 독단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경향은 7/8/9 차 십자군에서 더 강해진다. 최초 교황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으로 생각된 십자군 원정은 말기에는 오히려 군주의 권위를 내세우는데 더 잘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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