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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5 차 십자군 2





 3. 5차 십자군의 모집


 서유럽 기독교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4차 십자군 이후 실추된 교회와 십자군의 명예와 성지 수복의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 두 교황 - 인노켄티우스 3세와 호노리오 3세 - 는 백방으로 새로운 십자군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5차 십자군의 최초 계획은 1208 년부터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는 상당히 현실주의적 정치인이었던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예루살렘 수복은 물론 아이유브 제국 해체를 염두에 두고 계획을 추진했다. 아이유브 제국이 건재하는 한 예루살렘 수복은 설령 성공하더라도 유지는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사실 3차 십자군 시절 사자심왕 리처드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무리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은 것도 그것을 유지할 가망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이유브 제국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점령하거나 적어도 아이유브 제국을 해체해야 했다.  


 1213 년 교황은 새로운 교서인 Quia maior  를 발표해 5 차 십자군의 모집을 선언했다. 그러나 십자군 모집은 지지부진했다. 왜냐면 당시 프랑스에서는 실지왕 존과 필립 2세가 대립하고 있었고 독일 역시 앞서 소개한 대로 오토 4세와 프리드리히 2세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15 년 11월 15일에 있었던 4차 란테란 공의회 (Council of the Lateran) - 아마도 중세에 열린 공의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의회였다 - 시기에 즈음 하여 교황은 새로운 교황 교서인 Ad Liberandam 를 발표하고 새로운 십자군 모집을 다시 역설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가 죽기전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두말할 것 없이 자신과 교회의 실추된 권위를 다시 세워줄 십자군이었는데 이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 두가지 모순된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사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누구보다 정치적인 교황으로 하느님의 나라보다 인간세상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성직자 치곤 극도로 현실주의적인 이 인물은 모든 일을 추진할 때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일을 추진했고 이점은 십자군 원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목표로한 아이유브 제국 해체와 예루살렘 수복은 전혀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가 아니었으며 그가 생각한 5차 십자군의 모습 도 현실적이지 못했다. 


1 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은 사실 그저 당시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자체적으로 와해된 덕분에 혼란한 틈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이슬람 무정부 상태에 대한 프랑스 군주제의 승리에 지나지 않았고 이슬람 무정부 시기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붕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십자군 국가들은 사실 현지 이슬람 교도들은 물론 토착 기독교도, 유태인들로부터도 지지를 못얻을 만큼 종교적,인종적으로 독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노켄티우스 3세는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이 각국의 왕이나 황제가 참가하지 않고 대신 성직자가 군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도 십자군이 그런 형태의 군대였던 적은 없지만 인노켄티우스 3세는 종교적으로 성지 수복에 대의에 고양된 기사들과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성령으로 충만한 성직자에 의해 인도되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5차 십자군 역시 주요 국왕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엔 없었다. 그리고 이들 국왕들은 물론 교황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줄 의도는 없었다. 다 나름의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국의 5차 초기의 십자군 모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공급처였다. 이는 프랑스에서 특히 봉건제가 잘 발달하고 기사들이 많았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5차 십자군에서는 원하는 만큼의 기사를 모집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시 시작된 알비주아 십자군으로 인해 십자군에 가담할 기사와 병사들이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앞서 이야기 한데로 교황권에 의한 지도를 받는 군대를 조직할 목적으로 새롭게 예루살렘의 라틴 교회의 주교 (라틴 교회란 명칭은 예루살렘 현지에 동방 기독교 및 토착 교회와 구분하기 위한 단어다) 로 메렝쿠르의 라울 (Raoul of Merencourt ) 을 임명하고 프랑스에서 십자군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또 교황은 4 차 십자군의 교훈을 되새겨 베네치아와는 손을 잡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웠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십자군이 1216 년 브린디시 항에서 출발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교황의 죽음으로 이는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5차 십자군 기간동안 이전과 비슷하게 여러차례 십자군 병력이 소집되어 성지로 향했지만   초기에 그 세력은 이전에 비해 미미했다. 알비주아 십자군 외에도 프랑스 - 영국간의 전쟁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헝가리 


 5차 십자군 초기에 가장 특이한 일은 바로 헝가리가 대규모 병력을 가지고 참전한 일이다. 헝가리의 엔드레 2세 (Andrew II of Hungary) 가 바로 원인이었는데 그는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벨라 3세 의 아들로 그의 형인 에메릭과 그의 어린 아들을 살해한 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단독 국왕 자리에 오른 야심가였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영웅 광장에 있는 엔드레 2세의 동상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release this work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


 그는 남쪽으로 자신의 왕국을 확장시킬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큰 장애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역시 남쪽의 라틴제국 (이전의 비잔티움 제국의 파편) 을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진 2차 불가리아 제국 이었다. 앞서 4차 십자군에서 언급했듯이 본래 비잔티움 제국을 호시탐탐 노린 것은 2차 불가리아 제국이 먼저 였는데 십자군과 베네치아에게 새치기 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라틴 제국을 위기로 몰고간 차르 칼로얀은 죽었지만 그의 두 조카인 보릴 (Boril 1207 - 1218) 과 차르 이반 아센 2세 (Ivan Asen II  1218 - 1241) 는 계속 정복 사업을 전개해 발칸 반도 통일을 목전에 둔 듯 했다. 



(이반 아센 2세 시절 최대 판도의 2차 불가리아 제국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release this work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 


 여기에 위기를 느낀 라틴 제국과 헝가리 왕국은 자연스럽게 동맹을 맺었는데 1215 년에는 헝가리의 엔드레 2세가 라틴 제국의 2대 황제인 앙리 1세 (라틴 제국 초대 황제 보두앵 1세의 동생. 참고로 이전 설명했듯이 보두앵 1세는 칼로얀에 의해 황제가 된지 1년만에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사망) 의 조카인 욜란다 (Yolanda) 와 결혼했다.


 그런데 때마침 (?) 1216 년 앙리 1세가 후사없이 죽자 역시 야심가인 안드레 2세는 자신이 제위에 오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주요 가신들이 이 의도를 알 수 없는 외국 군주 대신 인척 관계에 있는 피에르 (Peter of Courtenay ) 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 그가 남쪽으로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던 것은 아마도 라틴 제국 제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안드레 2세 역시 그냥 피에르를 시인하는 수 밖에 없었으며 아버지 벨라 3세때 행해진 십자군에 대한 맹세를 지키기 위한 목적 때문에 참전을 결심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확실한 사실은 그가 5차 십자군에서 가장 많은 2만명의 기병을 포함 3만 2천의 병력을 데리고 참전했으며 과거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에서 헝가리 왕국의 보호하에 있던 자라 항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병력 수송의 필요성에 의해 베네치아와 손잡고 성지로 병력을 실어나르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여기에서 부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의도는 전혀 지켜지지 못했다.  


 독일 


 독일에서는 아직 황제의 관을 쓰지 못하고 단지 시칠리아 왕 및 독일왕 (이전에 로마인의 왕이라고 했던) 에 자리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에 참전하기로 맹세한 상태였다. 신성로마 제국황제는 당대에는 왕위의 왕으로 생각되어 이런 왕위에 오른 후 다시 교황으로 부터 관을 받아 황제로 오르는 것이 관례였다.


 아무튼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참전을 약속했고 이 경우엔 교황도 참전을 꼭 바라고 있었다.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은 황제의 참여 없이 대규모 병력이 참여한 적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교황이 1216 년 승하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약속을 사실상 파기했으며 소수의 병력만을 보냈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시기 다시 병력을 대거 이끌고 참여한 독일의 유력 군주는 3차 십자군에서 사자심왕 리처드 1세를 구금했던 오스트리아 공작 (Duke of Austria) 레오폴트 5세의 아들인 레오폴트 6세였다.


 따라서 5차 십자군 초기에 병력의 대부분을 이룬 것은 특이하게도 헝가리 군대였다. 하지만 5차 십자군 역시 초기 부터 각각의 군대는 전혀 통일성 없이 따로 움직였다. 사실 5차 십자군 자체가 유기적인 하나의 군사 행동 보다는 그냥 이시기 있었던 독립된 십자군 군대를 총칭하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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