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 우리 나라 역사상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사건 중 하나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긴 하지만 일반적인 평가는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로 보는 시각이 많으며, 여기에 사대주의라는 평가까지 합쳐져 일반적으로 최근에 와서는 대개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이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이 위화도 회군과 이후에 있던 권력 투쟁은 사실 단순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간단한 사건은 아닌 듯 싶다. 비록 필자의 지식이 짧긴 하지만 이 위화도 회군과 그 전후로 있던 권력 투쟁에 대해서 재조명 해보고 싶다.
(이성계 영정 - 위화도 회군 사건의 가장 중요한 참조인이다)
1. 위화도 회군 이전의 고려
일단 회군에 배경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꺼내려면 회군 이전의 상황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특히 회군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에 대한 소개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당시 시대에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왕일 것이다. 회군 당시 왕은 우왕이었다. 우선 이 우왕이란 인물과 당시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기로 한다.
우왕은 사실 그 부친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은 인물이다. 우왕의 탄생 내력은 이러하다. 본래 공민왕은 후사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판 라스푸친이라고 불릴 만한 신돈 - 신돈 역시 평가가 좀 엇갈리는 인물이다 - 이 자신의 집에 미모가 뛰어난 여종이 있어 이를 취하라고 말한다. 공민왕은 신돈의 집으로 가서 이 여종과 동침한다. 그런데 이 반야라는 여종이 회임을 하게 된다. 이후 사내아이를 낳으니 그 아명을 모니노라고 하고 이후에 이름을 우라고 했다.
사실 이 아이는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냈다. 아무래도 정말 공민왕의 자식인지가 다소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그러다 1374년 공민왕이 어이없이 살해당하자 당시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에 의해 불과 10살의 나이로 왕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은 출생 때문에 우왕의 치세는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우왕이 즉위하자 말자 북원 (당시 명에 의해 북쪽으로 밀려난 원나라) 에서는 공민왕의 후사가 없는데 왜 왕 추대했나며 이를 비난하며 심양왕 탈탈불화를 고려왕으로 책봉한다. 1375년 탈탈불화 일행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고려로 향하지만 실권자 이인임에 의해 저지 당한다. 당시 힘이 약해진 북원은 하는 수 없이 1377년 우왕을 정식으로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다.
그러나 당시는 1368년 건국된 명나라가 그 힘을 점차 키우고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북원만 믿고 살수 있던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1378년 고려는 다시 명나라에 우왕을 국왕 책봉의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당시 명원 교체기로써 고려가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공민왕이라는 시호도 명나라에서 받은 것이었다.) 당시 고려는 북원에도 사대를 하고 명에도 사대를 했다.
그런데 명원 교체기에 초기엔 아무래도 원나라의 입김이 셌지만 점차 명나라의 힘이 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원 정책을 펼친 것으로 잘 알려진 공민왕 이후에 사실상 어린 우왕을 끼고 권력을 잡은 이인임은 사실 친원파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는 새로운 다크 호스 명나라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친명파들이 있었다. 이들 중 김구용, 이승인, 정도전, 권근 등은 친원파인 이인임을 탄핵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인임도 가만히 당하진 않았다. 당시 이인임은 최영, 지윤등과 힘을 합쳐 반대로 이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친원파인 이인임파의 새로운 실세 최영이다. 흔히 '황금 보기를 돌 보듯 하라'라는 좌우명으로 더 잘알려진 이 인물은 고려말에 등장한 대표적 군벌 겸 정치인 중 하나였다. 간단히 이분의 약력을 보자.
<본관 동주(東州). 시호 무민(武愍).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수차 왜구를 토벌,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으며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 때 원(元)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벌하고 귀국,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했다.
1358년 양광·전라도 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 때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선 400여 척을 격파했으며 1359년 4만의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平壤)을 함락하자 1360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을 지냈다. 1361년 홍건적이 창궐, 개경(開京)까지 점령하자 안우(安祐)·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金鏞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 군사 1만으로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의주(義州)에서 섬멸했으며, 이어 박백야(朴伯也)가 연주(延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시켜 격퇴했다. 1365년 강화(江華)에서 왜구와 싸우던 중,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되고 훈작(勳爵)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복직,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냈다.
1374년 제주(濟州)의 이른바 호목(胡牧)의 난에는 양광·전라·경상도 도통사로 난을 평정,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元帥) 박원계(朴元桂)가 참패당하자, 최영이 홍산(鴻山)에서 적을 대파,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 서강(西江)에, 1378년 승천부(昇天府:豐德)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 등과 섬멸, 안사공신(安社公臣)의 호를 받았으며,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서 왜구 때문에 서울을 철원(鐵原)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철회시켰다.
약력을 보면 매우 대단한 무훈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웅이란 난세에서 나오는 법. 최영, 이성계, 조민수 같은 군인들이 당시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침략, 그리고 명원 교체기의 정세 불안과 고려 내부의 잦은 정변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즉 당시엔 난세였고, 아무래도 힘있는 군인들이 군벌을 이루어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사실 무신 정변 이후로 고려 정치는 군인들의 비중이 아무래도 높았다. 사실 이인임 또한 홍건적에 난에서 큰 공을 세워 출세한 일종의 군벌이었다.
(여기서 뜬금없지만 최영 장군 하면 생각나는 최영지묘이다.)
앞서 말했듯이 최영은 친원파인 이인임과 합심해서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영이 역사에 이인임파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일이 밥먹듯 있었던 고려 정계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간 충격적일지 모르지만 최영은 자신보다 19세 정도 어리지만 비슷하게 여러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던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인임파를 숙청하고 자신이 최고 권력자가 된다. 당시 총리직이던 문하 시중이 된 것이다.
(아무리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세상이지만 최영 장군이 이성계와 손잡고 자신이 지지했던 이인임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니 처음 아신 분들은 다소 놀랄 듯. 다만 이인임 본인은 숙청하진 않았다고 함)
최영이 새로운 일인자로 등극하자 허수아비 같던 우왕은 최영의 딸을 비로 맞아들여 재빨리 최영의 사위가 된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 당대의 실권자 최영과 친해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1388년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최영은 우왕의 기대와는 달리 1년도 못 넘기고 몰락하고 말았으니....
이 사건에서 이제 중앙정계에 새롭게 진출한 샛별이 있으니 바로 방금 언급한 이성계이다. 여기서 이성계의 약력도 같이 보도록 하자.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움으로써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川江)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삼선(三善) ·삼개(三介)가 함경도 화주(和州)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
13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로 승진, 13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 네이버 사전 증
위의 약력이 웬지 최영과도 다소 겹치는 듯 한 이유는 역시 고려말의 외적의 침입이 빈번한 상황에서 그 역시 군사적 실력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군벌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이성계야 말로 위화도 회군의 주인공이다.
2. 요동 정벌
당시 동북아의 정세는 점차 명나라가 북원을 밀어내고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시점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본래 고려는 친원파인 이인임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이었다. 따라서 이인임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장악한 최영도 아마도 처음에는 양다리 외교를 펼칠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1368년 남쪽에서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홍무제)는 이후 북벌을 감행해 대도(베이징)을 점령하고 원순제 (토곤 티무르)를 북쪽으로 몰아낸다. 원순제는 1370년 사망하고 외몽골로 피신한 원소종은 1372년 명나라의 침공을 격파하였으나 이후 북원의 세력은 차츰 쇠퇴했다. 1387년 만주에 있던 북원군의 장수 나하추가 명에 투항해 북원의 국력은 더 기울었다. 결국 북원군은 1388년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명의 대군에 대패하였고, 원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토구스 티무르 도 도우라강 기슭에서 살해되어 쿠빌라이 가문의 대가 끊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운명적으로 홍무제가 중국을 사실상 통일한 것은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진 1388년 이었다. 이후 홍무제는 외정을 자제하고 내치에 힘을 쏟았다. 한편 더 북쪽으로 몰려난 북원은 이후 20년간 6명의 군주가 교체되는 혼란을 겪으면서 타타르로 국명이 바뀐다.
따라서 이쯤 되면 이제 명나라로 줄서기를 하는게 나름 당시엔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최영이 그렇게 할 수 없는 데는 명나라의 탓이 컸다. 명나라에서 고려의 철령 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복속시키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온 것이다.
사실 고려가 말기에 사대를 해도 공민왕 시절 때는 공공연하게 원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그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영토를 바치라는 데 그냥 'Yes' 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우리 영토안에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적에게 선제 공격을 할 지는 순전히 전략적인 문제였다.
이 때 최영은 요동으로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정하고 우왕도 이런 결정에 동의한다. 사실 내가 의문을 품은 건 여기서 부터이다. 당시 명나라가 조선보다 강대국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분명히 북벌을 마친 명나라는 상당한 실전 경험을 가진 다수의 병력이 있을 것이다. 물론 고려도 혼란한 시기에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력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숫자상 명나라 보단 열세였다. 그러면 일단 영토를 내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방어전을 준비하면 안되었을까?
일반적으로 공격 측은 방어측에 비해 3배의 전력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공격 보다 방어가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우리의 홈그라운드에서 방어를 하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 있다. 익숙한 지형과 더불어 보급도 용이하고 주민들의 협조도 구하기 쉽다. 그래서 베트남도 미국을 홈그라운드에서 몰아냈고 아프가니스탄도 강대국이 아니지만 좀처럼 강대국에 점령되지 않는 국가가 된 것이다.
물론 혹자는 요동이 과거 우리 땅이니 이걸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고 이런 점에서 최영을 높히 평가할 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당시 여유가 된다거나 하다면 모를 까 무리하게 영토를 확장하려 할 이유는 없다. 만약 요동 정벌을 시도하다 우세한 명나라군에 격파 당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삼전도의 굴욕과 비슷한 일을 당하고, 철령 이북의 땅도 뺐겼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병력을 소모하고 난 이후 여진족과 왜구의 침공은 과연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리고 결국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끝까지 자신들이 가지려 하진 않았다. 이것은 이후 명나라에 사대한 조선 왕조가 결국 이 땅을 바치지 않았던 데서도 드러난다. 요컨데 명나라의 청을 거절하고 우리땅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분들은 꼭 요동 정벌이 실패하란 법은 없지 않느냐고 말할 지 모른다. 물론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키기는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우세한 병력을 지닌 명나라가 이를 두고만 볼리 없고, 우리는 왜구와 여진족등을 생각할 때 요동 반도를 점령하기 위해 끊임없이 병력을 투입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가 과거 우리에 복속해 있던 쓰시마 섬을 반환하려고 요구하고 일본을 침공한다고 하자. 아니면 간도를 돌려달라고 중국을 침공한다고 치자.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 성공 가능성도 희박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나라에 큰 피해만 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국제 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본이 제주도나 독도를 점령하려 든다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킬 것이고 국제 여론도 우리 편일 것이다. 우리가 남을 침공하는 것 보다 지키는 것이 더 수월할 것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성계의 사불가론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점이다. 예로 부터 작은 나라가 큰나라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건 꼭 병법에 이르지 않더라도 상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적이 침공해서 점령하려 든다면 끝까지 자기 나라를 지키려 할 것이다.
아무튼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을 이쯤에서 끝내고 다시 요동 정벌로 돌아가면, 일단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들여 이 일을 의논하는데 이성계는 여기서 유명한 사불가론을 말한다. 첫째로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농사에 지장을 초래하니 불가하고, 셋째는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할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이고, 넷째는 장마로 인해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릴 염려고 있고 병사가 질병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불가하단 것이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기각하고 서경으로 가서 각도에 병사를 모으도록 채촉하고 압록강에 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승려까지 징발하여 병사를 확충했다. 최영은 팔도군도통사가 되어 최고 사령관이 되고 이성계와 조민수를 각각 우군도통사 및 좌군도통사로 삼아 약 4-5만 정도의 원정군을 편성한다.
여기서 또 한명 주목할 인사가 나온다. 바로 조민수 이다. 조민수는 당시 이성계에 필적한 군벌 중 하나로 역시 고려말의 혼란기에 두각을 나타낸 군인 중 하나다. 간단히 약력을 보자.
본관 창녕(昌寧). 1361년(공민왕 10) 순주부사(順州府使)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쳐 공신 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사 동지사(密直司同知事) 등을 지냈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 의정주등처 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처하고,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우왕 초 경상도도순문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를 겸하고, 1385년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한 뒤 위화도(威化島)에서 이성계(李成桂)와 회군(回軍)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都統使)를 지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여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昌寧)에 유배된 뒤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이듬해 다시 창녕으로 유배, 배소에서 죽었다. - 네이버 백과 사전
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여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昌寧)에 유배된 뒤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이듬해 다시 창녕으로 유배, 배소에서 죽었다. - 네이버 백과 사전
여기서 보면 조민수 장군은 우리에겐 친숙하진 않지만 사실 이성계보다 더 중앙 정계에 먼저 진출하여 1383년에 이미 총리직인 문하시중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홍건적의 난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정계에 진출한 것은 최영, 이인임, 이성계 등과 비슷하다.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이성계와 함께 회군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민수는 조선 왕조 창건 과정에서 이성계의 가장 중요한 라이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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